본문 바로가기
정신의 풍요/명상

궁극의 경지, 무경계! 인간의 본질과 깨달음의 지평에 관한 가장 정교한 통찰

by 우정_[우리삶의정원] 2025. 5. 2.

 머리말 

 (p.15) 《무경계》는 물질로부터 몸, 마음, 혼, 영에 이르기까지 인간 의식의 접근 가능한 '전 대역'을 제시한 초기 책 중 하나였으며, 최선의 심리학과 최선의 영성을 통합시켜놓은 책이었다. 한 개인을 성장과 발달로 이끌어주는 동서양의 모든 접근법 중에서 최선의 것을 기술하는 동시에 '잠재의식→자의식→초의식', '전개아→개아→초개아', '본능→에고→신성'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의식의 스펙트럼'을 보여준 책이다.
무경계의 기본메시지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당신 자신의 근원적인 자각과 정체성 자체에는 본래 아무런 경계도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근원적인 정체성은 물질로부터 몸, 마음, 혼, 영에 이르는 의식의 스펙트럼 전체에 걸쳐 있다. 달리 말하면, 가장 깊은 곳 혹은 가장 높은 곳에서 그 전체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이토록 놀라운 당신 자신의 진정한 무아적 본질로 이끌어주는 간단한 지침서이다.


 1. 서론 : 나는 누구인가?


(p.26)이토록 장엄하고 영감 어린 경험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은 -우리는 바로 이 측면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 그 안에서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자신과 온 우주가, 높든 낮든 신성하든 세속적이든, 모든 세계와근본적으로 하나라고 느낀다는 점이다. 이때의 '자기 정체감'은 몸과 마음이라는 협소한 한계를 넘어 확장되며, 우주 전체를 감싸 안는다. 버크가 이러한 자각상태를 '우주의식'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슬라교도들은 이것을 '지고의 본성'이라고 부른다. '지고'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온 우주 그 자체와의 사랑으로 가득 찬 포옹을 우리는 '합일의식'이라고 부를 것이다.

 

 
 

 2. 그것의 절반


(p.49)결정한다는 것은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을 의미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쾌락적인 것과 고통스러운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둘 중에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어떤 관념을 주장한다는 것은 진실이라고 느낀 개념과 진실이 아니라고 느낀 개념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일이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어디에 어떻게 경계를 그을 것인지, 그런 다음엔 경계를 지은 측면들로부터 어떤 일을 해야 할지를 배우는 일이다.
(p.52)쾌락에 집착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이 고통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선을 추구하면 할수록 악에 대한 강박관념은 더욱더 강해진다. 성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실패를 더욱더 걱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삶에 집착할수록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무언가에 가치를 두면 둘수록 그것의 상실이 두려워진다. 다시 말해,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은 경계로부터 비롯된, 경계가 만들어낸 문제라는 것이다.


 

 3. 무경계 영토


(p.74)과학적 법칙을 공식화하는 이 모든 과정이 세 가지 유형의 경계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각각의 경계는 이전의 경계 위에 좀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형태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첫째로, 우리는 분류를 위한 경계를 긋고 서로 다른 사물과 사건들의 차이를 인식한다.
둘째로, 분류된 요소들 중에서 측정가능한 것들을 찾아낸다. 이 메타 경계는 질을 양으로, 범주를 범주의 범줄, 요소를 측정치로 바꾸어 놓는다.
셋째로, 두 버째 단계의 여러 숫자와 측정치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그것들을 전부 포함하는 대수공식을 만들어낸다. 이 메타-메타 경계는 측정을 결론으로, 수를 원리로 바꿔준다. 이처럼 매 단계의 새로운 경게는 더욱 일반화된 지식과, 그에 수반되는 더욱 큰 힘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이런 지식과 힘, 통제력은 그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는 언제나 양날의 칼이며, 그 칼로 잘라낸 자연의 열매는 필연적으로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얻었지만,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장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내야만 했다.


 

 4. 무경계 자각


(p.93)환상을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수는 없다. 환상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요가, 정신집중, 기도, 의식, 찬송,, 단식과 같은 꽤 공이 드는 활동을 통해 최초의 경계를 파괴하려는 시도조차도 실은 파괴하려고 하는 바로 그 환상의 더욱 강화시키고 영속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캄브라이의 대주교 페넬롱은 "'환상을 피하려는 시도'만큼 위험한 환상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최초의 경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먼저 최초의 근원적 경계 그 자체를 찾아보려고 시도할 것이다. 만일 그 경계가 정말로 환상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그 흔적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합일의식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처음부터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이해하게 된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런 통찰 자체가 희미하게나마 이미 무경계 자각을 감지하는 것이다.


 

 5. 무경계 순간


(p.117)모든 주요 종교와 철학 학파의 위대한 현자들의 말씀을 다 동원한다면, 이런 인용문은 끝없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두는 결국 또같은 것을 가리킬 뿐이다. 영원이란 내일 발견 되는 것도, 5분 후에 발견되는 것도, 2초 이내에 발견되는 것도 아니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인 것이다. 현재만이 유일한 실재이다. 거기에 또 다른 실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온전히 지금 이 순간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어제에 살면서 끊임없이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라는 고통스러운 사슬에 묶이고, 있지도 않은 유령을 불러내어 스스로를 속박한다. 기억과 기대라는 공상의 안개 속에서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로써 현존하고 있는 근원적 실재를 박탈하고는 그것을 '허울 좋은 현재'또는 '빈약한 현재', 즉 고작 1~2초 정도 머물다 사라져버리는 영원한 현존의 창백한 그림자로 전락시킨다. 무시간적 순간 속에 살지 못하는 무능력과 영원의 기쁨 속에 잠기지 못하는 무능력 때문에, 우리는 현재 순간의 무기력한 대용품인 '시간의 약속'-지금 갖지 못한 것을 미래엔 갖게 되리라는 -을 계속 추구한다.
   신비가에 따르면, 시간 속의 삶은 고통 속의 삶이다. 왜냐하며 신비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시간에서 비롯된' 또는 '시간 속의' 문제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 적이 없겠지만, 잠시 숙고해보면 그 말이 너무나 명백한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문제는 시간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의 걱정은 언제나 과정 또는 미래에 걸쳐 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지른 수많은 행동을 후회하며, 그로 인한 미래의 결과를 두려워한다. 죄책감은 과거와 단단히 결합되어 우울증, 쓰라림, 후회라는 고뇌를 가져온다. 이 말에 납득되지 않거든, 과거의 상처가 전혀 없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한 번 상상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불안은 미래에 대한 생각과 한데 묶여서 두려움과 파멸적 기대라는 먹구름을 가져온다. 과거와 미래! 이 둘이 우리를 고뇌라는 족쇄로 채우고 있음은 분명하다.


 

 6.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p.140)우리는 미래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 순간 기대와 미완성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매 순간을 '스쳐 보내면서' 살아간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인해 진정한 눙크 스탄스, 즉 무시간적 현재는 눙크 플루엔스, 즉 그저 덧없이 질주해가는 1~2초의 현재, 스쳐 지나가는 현재로 전락한다. 우리는 매 순간이 미래의 순간으로 '지나가기를'기대한다. 언제나 상상 속 미래를 향해 달려감으로써 죽음을 '도피하는 척'하려고 말이다.

  우리는 미래 속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만을 원하지 않는다. 또 다른 지금, 또다른 지금, 그리고 또 다른 지금.... 내일, 또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을 원한다. 그렇게 해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지극히 짧은 현재는 우리가 그것이 끝나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덧없이 재빨리 지나가 버린다! 현재가 끝나길 바라는 것은 그래야 미래의 순간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래의 순간도 역시 다만 스쳐가지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직도 시간에 대한 이야기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제 전적으로 자신의 유기체와만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유기체에게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기억이란 흔적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게 된다. 마치 기억이 진정한 실체인 것처럼, 마치 진정한 자신의 진정한 과거를 말해주는 것처럼 우리는 기억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얌전히 사로잡히고, 무조건 과거의 기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7. 페르소나 수준 : 발견의 출발점

 

(p.149)스펙트럼 상의 하강과 발견의 태동은 삶에 대한 불만이 의식되는 순간 시작된다. 대부분의 전문적인 의견과는 받내로, 삶에 대한 극심한 불만은 '정신질환'의 신호가 아니다. 잘못된 사회적응의 지표도 아니며 인격장애 역시 아니다. 왜나하면 삶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불만 내부에 감춰져 있는 것은 흔히 엄청난 무게의 사회적 위선에 매몰되어 있는 특별한 지성, 성장하는 지성의 싹이기 때문이다. 

  삶의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은 동시에 보다 심층적이고 진정한 실재러서 '깨어나기'시작한다. 고통은 현실에 대한 소위 표준적인 자기만족에 대한 위안을 산산조각내며,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 회피해왔던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과 세계를 세심하게 보고 깊이 느끼고 접하게 함으로써, 특별한 의미에서 살아 있게끔 강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최초의 은총'이라는 말이 전해오는데, 나는 이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특수한 의미에서, 고통은 거의 환희의 순간이기도 하다. 고통은 창조적인 통찰력이 탄생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p.155)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머물러 있는 곳, 즉 페르소나 속에 갇혀 있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페르소나란 다소간 부정확하고 허약해진 자기상을 일컫는다. 페르소나는 분노, 자기주장, 성적 충동, 환희, 적대감, 용기, 공격성, 충동, 흥미 등과 같은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8. 켄타우로스 수준

 

(p.179)신체를 소유한다는 것이 처음엔 괴이한 주장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자아와 육체 사이의 경계는 보통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너무나 깊이 파묻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둘 사이의 분열을 치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당혹감과 권태가 혼합된 묘한 반응을 보인다. 마음과 신체 사이의 경계를 꼼짝없이 실재하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경계의 해체는 고사하고 왜 그 경계에서 간섭하려 드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신체를 잃어버렸다. 나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는 마치 자신이 말 위에 앉아 있는 기수인 것처럼, 몸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낀다. 나는 필요에 따라 때리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고, 먹이고 목욕시키고 보살피기도 한다. 나는 신체와 아루런 상의도 없이 그것을 충동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신체의 의지와는 반대로 억압하기도 한다. 신체(말)가 착한 일을 할 경우 대체로 무시하지만,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굴면-이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채찍질해서 다시 복종시킨다. 

 

(p.186)처음에 신체와의 결합을 시도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담요나 매트 위에 팔다리를 쭉 편 채 위를 향해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깊고 편안하게 숨을 쉬면서 신체의 느낌을 탐색하는 것이다. 어떤 것도 느끼려고 '노력할'필요는 없다. 느낌을 강요하지 말고, 단지 신체를 통해 주의가 흐르도록 자유롭게 놓아둔 채 신체의 다양한 부위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느낌이 드는지만 알아차린다. 

 

(p.200)이처럼 수의적인 의도적 활동조차 사실상 저 아래 어딘가에서는 켄타우로스의 자발성, 즉 수의적 과정과 불수의적 과정의 기저에 놓여 있으면서 모두를 통합시키는 그 자발성과 일체이다. 이 심층 수준에서의 '나'는 쿠마라스와미가 말한 것처럼 "현재 속의 영속적이고 계산되지 않는 삶"을 이끌어간다.

  이 수준을 지향하는 어떤 치료법이든, 그 치료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미묘하면서도 넓게 스며드는 자각의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켄타우로스를 부활시키고 켄타우로스 이전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시작함에 따라 일어난다. 이런 잠재력은 자아의 잠재력과 신체의 잠재력을 단지 합해 놓은 정도가 아니라, 부분의 합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의 전체성이다. 롤로 메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든 신체든 무의식이든 '자율적'일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다만 전체성의 일부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의지와 자유가 자신의 기반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이 전체성이다."


 

 9. 초월적인 나

 

(p.207)켄타우로스 수준을 떠나 초개아 대역으로 이동해감에 따라, 이제 우리는 자신과 세계에 대한 친숙한 상식적 지침을 뒤에 남겨놓게 된다. 저너머의 세계이자 저 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아를 초월해 있으며 그 자신을 훨씬 넘어선 무엇을 드러내주는 또 다른 자각과 만나기 시작한다. 이 수준에 적절한 훈련이라면, 어떤 것이든 조만간에 개아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의 자각으로 개방시켜준다. 이 자각은 본인 자신을 광대하고 미묘한 초개아적인 세계로 들어올려줄 그야말로 깊고 심오한 자각이다. 

 

(p.211)무의식의 일부에는 (페르소나, 자아, 켄타우로스 수준에 상응하는) '개인적인'기억들, 사적인 소망과 관념, 경험과 잠재력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심층영역, 즉 '자신의 내면'에 있는 집단무의식은 인류 공통의 주제들이 저장되어 있다. 우리 존재의 심연에는 세계의 고대신화라는 형식으로 외부로 표현된 모든 남신과 여신, 신성한 존재와 악마, 영웅과 악한드이 응축된 형태로 존재한다. 융에 의하면, 우리가 그런 사실을 알든 모르든, 그것들은 거기에 계속해서 살고 있으며, 창조적이거나 파괴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교묘히 조종한다고 한다. / 이런 의미를 자신의 깨어 있는 의식에 통합시킨다면, 당신은 더 이상 그 힘에 강제로 지배다하지 않게 되며, 그에 따라 영혼의 심연은 풀려나기 시작한다. 통상적인 자아의 단단하고 두꺼운 표층과 켄타우로스의 자각이 부드럽게 깨지고 초월적 존재의 성장이 가능해진다. 이런 과정의 성장은 개아적 삶을 초월하는 동시에 '심층적 나'의 측면을 이루는 것들이다. 

 

(p.229)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인내심이 필요한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다름아닌 이생에서 이루는 해탈이다. '초월적인 나'는 모든 전통에서 신성의 빛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원리적으로 '초월적인 나'는 - 당신이 신을 어떻게 인식하든 - 신과 동일한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궁극적, 근본적으로는 심오한 곳에서 오직 신만이 당신의 눈을 통해 보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듣고, 당신의 혀로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생 클레망이 "자기 자신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이것이 융의 메시지이고, 또한 미대륙의 원주민, 도가,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를 막론한 모든 성인과 현자, 신비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즉 "당신 영혼의 심연에는 인류의 영혼이 존재한다. 속박에서 해방으로, 마법에 걸린 상태에서 깨어남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죽음에서 불사로 이끌어주는 초월적 영혼 말이다."

 

 

 

 10. 궁극의 의식상태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다.

운명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

길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이것이 궁극의 진실이다.

 

-라마나 마하르쉬-

 
 

(p.233)합일의식은 무시간적 순간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도달할 방법은 분명히 없다. 이미 그런 것에 새삼 '도달할' 방법이 달리 있을 리 없다. 따라서 라마나가 시사한 것처럼, 합일의식에 이르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궁극의 진실이라고 선언한다. / 그러나 합일의식 수준에 이르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합일의식은 부분적인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합일의식은 거울이 모든 대상을 똑같이 비추는 것처럼,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합일의식이란 다른 의식 상태이거나 다른 상태와 분리된 별개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상태의 조건이자 진정한 본성이다. 만일 합일의식이 다른 상태와 별개의 것이라면(예컨대, 지금 이 순간의 자각과 다른 것이라면), 그곳에는 자신의 현재 자각과 합일의식에는 그 어떤 경계도 없다. 즉, 그것을 다른 그 무엇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깨달음은 이 순간,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선명하게 빛을 비춘다. 

  이 점을 설명하는 데는 아마도 단순한 비유가 도움이 될 것 같다. 스펙트럼의 여러 수준은 대양의 수많은 파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하나하나의 파도는 다른 모든 파도와 분명히 다르다. 해변에 가까운 파도는 강력하고 힘차지만, 먼 곳의 파도는 약하고 힘이 없다. 그러나 파도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파도와는 다르며, 그렇게에 파도타기를 할 경우 자신의 능력에 따라 특정한 파도를 선택하고, 그 파도에 올라타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파도가 서로 다르지 않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스펙트럼의 수준은 하나의 특정한 파도와 같은 것이며, 그렇기에 올바른 기술과 충분한 훈련을 통해서 그들 중 어떤 것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진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중생은 그것을 먼 곳에서 찾는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비유컨대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짓는 사람과 같다. 

-하쿠인

 

 

 


 


 

 성찰 및 느낀점 

자연의 이치

 

   자아의 상태가 여러 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대략 알긴 했지만, 이렇듯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서술해 놓은 면이 새로운 언어를 만나게 된 것처럼 흥미로우면서도 다소 어렵다. 페르소나, 켄타우로스의 상태도 경험한 듯 싶으나, 스스로 '과거'의 감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안다. 아니, 변화되지 않는 지점에서는 '과거'라는 허울 좋은 경험 때문이라고 덮어씌우면서 변화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 누구도 자시을 규정짓지 못하는데, 나 스스로 안전한 곳에서 배회하며 열심히 뛰고 있다고 나를 내 세상의 틀안에 나름의 모양대로만 규정짓고 있는건 아닌지! 

  순간과 지금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다음 순간과 내일의 하루는 현재 걷고 있는 트랙을 벗어나 아주 새로운 트랙으로 옮겨탈 수 있지도 않을까? 언젠가 나는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침에 눈을 떳을 때, 어제와는 다른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하루를 새로운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불현듯 일어났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일기장을 꺼내고 나의 삶의 새로운 막이 열릴 것이라고 기록해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무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은 그 시기, 늘 신고 다니던 헌 운동화가 갑자기 새 운동화로 느껴지던 기분! 그 해 나는 많은 새로운 경험들과 기록들로 내 시간을 채우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목마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목표들로 인해 현재를 놓칠까봐 조금은 불안하다. 특히 무언가 두려움이 몰려오면 나약한 나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그 괴로운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핑계를 과거 안에서 찾고 주변의 탓으로 돌리며 값싼 위로와 과거에 대한 집착을 선택한다. 그러면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고통과 괴로움, 고뇌, 외로움에 대한 관점이 "무경계 발견"의 시작이라고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설명하니 안도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용기를 얻는다. 내 지난 혼란과 슬픔, 외로움과 답답함의 많은 감정들이 나를 한단계 더 심오한 생명으로 데려주기 위한 소품이었다는 생각들을 해보며, 그 소품들을 놓지않고 그냥 가방에 넣고 떠나보기로 한다. 유일하고 존귀한 나만의 인생길... 그 길에 만나는 소중한 사람들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 이 또한 욕심이겠지만 아직은 이 욕심은 놓고 싶지 않은 이 상태의 나다.